ESG의 시대, 에코피아의 상상력을 꿈꾸며 3: 기후 위기 시대의 정치학
기후 위기의 시대다. 이 위기는 전지구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결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될 것이라고들 말한다. 이에 대한 수많은 과학적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친다. 지금까지 과학적 증거가 총망라된 UN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가 2021년 8월에 발행한 6차 평가보고서에 의하면 지구 평균온도가 2040년 전까지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1.5도 높아질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제시한 2040년의 시한은 2018년 결과보다 10년이나 앞당겨진 시기다. 그리고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2030년 정도에 그 시점이 도래할 가능성이 높다. 보고서는 과학적 근거를 종합해볼 때, 현재 인간의 활동이 기존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정도로 지구 온난화를 촉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잠깐. IPCC의 6차 보고서가 객관적인 과학적 “사실”에 그치지 않고 우리 인류에게 경고가 되기 위해서는 지구의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에 비해 1.5도 상승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야 한다. 현재 지구는 산업화 이전에 비해 평균 온도가 1도 오른 상태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북극과 남극의 산더미같은 빙하들이 이상 고온 현상으로 속절없이 녹아내리고 그 영향으로 해수면이 상승하여 저지대의 상당 부분이 침수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지구 온난화로 인해 대기와 해양의 안정적 순환이 교란되어 폭염과 폭우, 때아닌 혹한, 극심한 가뭄과 그로 인한 대형 산불 등 이런 극단적 기상 이변을 보고 있다.
여기서 지구 평균 온도 0.5도가 더 오른다는 것은 당연히 이런 현상이 더 가혹하고도 빈번히 일어난다는 뜻인데, 문제의 심각성은 그 빈도와 강도가 현재의 50% 정도에 그치지 않고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데 있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시나리오는 이렇게 진행될 경우 최소한의 자가 조절 기능이 있었던 지구 시스템이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도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경우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해도 지구를 이전과 같이 되돌릴 수 없고 지구는 폭주하는 열차와 같은 상태가 된다.
이 지점을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고 하는데, 과학자들은 그 임계점이 산업화 이전 지구 평균 온도보다 1.5도에서 2도 사이에서 높아진 상태에서 온다고 본다. 여기에 시베리아의 영구 동토층이 녹으며 방출될 수도 있는 최악의 온실가스인 메탄과 빙하에 갇혀 인류가 접한 적이 없었던 미지의 고대 바이러스는 재앙의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을 몰고 올 것이다.
이런 종말론적 전망은 모두 객관적인 과학적 사실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성적으로 즉각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기후 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청소년들의 매우 적극적이고 선도적인 행동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운동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기후 위기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알기는 해도 그것이 우리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문제라는 데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한다.
해마다 극지방의 기록적 고온 현상이 이어져 빙하가 기하급수적으로 녹고 있지만, 그것은 북극곰의 일일 뿐 나의 일상적 삶과는 무관하다. 해수면이 올라서 인간 삶의 터전이 위협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태평양 투발루 같은 섬나라의 일일 뿐 우리가 사는 곳은 여전히 안전하다. 나는 내 삶의 터전에서 성실히 일하고 여가를 즐기며 나와 가족의 미래를 위해 안정적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면 족하다.
이런 태도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필자를 포함하여 우리가 모두 공유하고 있는 평범한 삶의 기본형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틀에서 추구하는 물질적 풍요, 편리, 안락은 기후 위기에 대해 진정성 있는 관심을 약화시킬뿐더러 안타깝게도 전지구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약탈적 속성에,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를 지향하는 규모의 경제에 상당 부분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기후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기후 위기와 관련한 불편한 진실이 다름 아니라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논설과 대중적 매체에서 환경, 기후 위기의 문제가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핵심 가치인 경제 성장, 풍요, 안락의 교의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수용되고 유통된다.
기후 위기가 남의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문제를 타자화하거나 시혜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재구성하는 데 상상력과 실천력을 모아야 한다. 나아가 이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개개인의 소소한 실천과 상상력이라는 구슬 뿐 아니라 여기에 의미와 재미를 부여할 의제를 설정하여 구슬을 꿸 수 있는 역할이다. 이것은 바로 기후 위기 시대의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민주주의는 인류가 구축해 온 수많은 정치체제 중 최선의 제도라고 한다. 그리고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으로 여겨진다. 선거철에는 으레 후보자들이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그들의 욕망에 부합하는 공약을 남발한다. 그 중 특히 지방선거에서 빠지지 않는 구호는 지역의 ‘성장’과 교통, 의료, 복지 등의 편리함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측면은 ‘지역 발전’이라는 대의와 긴밀히 연결된다. 오늘날 현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에서 지역 혹은 국가 발전의 대의를 표방하는 공약과 개인의 욕망을 부추기는 공약이 기묘하게 얽혀있는 상황을 볼 때, 필자는 현대의 대의 민주주의가 어떤 의미에서 성장 중독 사회의 포퓰리즘과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산 정약용은 정치의 근본에 대해 사색한 글 “원정(原政)”에서 정치[政]란 바로잡는다[正]는 의미로 재해석하면서 당시 만연한 불평등과 불공정을 바로잡는 일이 당면한 정치의 과제라고 보았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정치에서 올바름, 바로잡음 등을 표방한다면 전통 사회의 유교 꼰대 문화를 떠올리거나 현대 사회의 이상만 앞서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생각하기 쉬울 것 같다.
그러나 정약용이 재발견한 유교 정치의 올바름에 대한 이상은 맹자가 일갈했듯 이익을 좇는 데 있지 않고 인의(仁義)를 추구하는 데 있는데[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그것은 교조적이거나 수직적이 방식이 아니라 위정자와 백성이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공동체성에 의존해야 한다.[與民同樂]
오늘날 기후 위기는 정치에서 새롭게 추구해야 할 올바른 가치로 인식되고 있다. 공적 영역에서 ESG가 강조되는 흐름은 그 방증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지향이 선언에 그치지 않고, 소박한 이상주의에 머물지 않으려면 시민들의 기후 행동을 의미와 재미로 엮어내는 공동체성의 정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글로벌 기후 정치가 언제나 국가 간 책임 떠넘기기로 시간만 보내왔음을 잘 알고 있다. 필자는 기후 위기 시대의 올바른 정치가 구현된다면 그것은 지역의 풀뿌리 정치에서 가능할 것이라는 데 희망을 품는다.
우리 남양주시는 지난 몇 년간 이전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ESG 행정의 씨앗을 뿌려왔다. 그 중 몇몇은 새로운 시도로 각광받기도 했다. 이제 앞으로 이 씨앗이 더 자라나 시민과 함께 즐기는 기후 행동의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대선이 끝나고 지방선거가 코앞에 다가왔다. 이번 선거는 그런 올바름을 구현하는 지역 정치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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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옥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