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암 정약용선생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정약용유적지(다산유적지)는 남양주의 대표 인물이며, 18~19세기 실학을 집대성한 사암 선생이 영면해 계신 곳이다. 선생은 1762년 임오년 6월 16일 아버지 정재원, 어머니 해남윤씨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7세 때 “산”이라는 시를 지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다. 부친 채재공은 “분수에 밝으니 자라면 역법과 산수에 통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10세 이전까지 지은 시문을 엮어 『삼미자집』을 펴내지만 안타깝게 전하지는 않는다.
소산폐대산 小山蔽大山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원근지부동 遠近地不同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정약용 선생 하면 실학과 천주교를 빼놓을 수 없다. 서슬 퍼런 시대에 나라와 민을 위한 500여 권의 저술과 2,500수의 많은 시를 남겼다. 15세에 풍산홍씨와 혼인을 하고, 16세에 성호가 남긴 글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성호의 뒤를 잇는 제자로 ‘백세의 스승’으로 사숙私淑하였다. “나의 생각이 꿈결처럼 혼미했는데 성호를 사숙함에 따라 깨달은 게 많다.”고 말씀하신 선생은 이 때부터 실사구시지학(옛것을 좋아하고 실제의 일에서 옳은 것을 구한다)의 길로 나아간다. “실학”은 실사구시의 다른 약칭으로 일컬으며, 실학이 등장한 시기는 1930년 정인보⦁최남선⦁문일평 등 조선학朝鮮學을 정립하면서 사용한 용어이다. 선생이 쓰신 일표이서(『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는 실학에 기반을 둔 낡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쓴 개혁서이다
선생의 집안은 8대가 옥당(홍문관)에 오르는 명문가로 자부심이 컸지만, 천주교로 많은 시련을 겪는다. 23세 때 큰형수의 제사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뱃길에 약현의 처남인 이벽에게 천주교에 대한 야기를 듣고 수표교에 사는 광암을 찾아가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보고 천주교에 영향을 받는다. 정약전을 비롯하여 정약용,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등 남인의 학자들이 천주 교리를 공부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이로 인해 사암은 두 번의 유배길에 오른다. 1차 유배지는 경상도 장기, 2차 유배지는 전라도 강진으로 젊은 나이 40세에 약전과 함께 한 유배길은 18년이란 길고 긴 슬픔의 시간이었지만 대작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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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옥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