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에서 온 편지 – 둘

형제들과 당호 이야기


정약용 선생의 형제는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정약현, 약전, 약종이다,

첫째 정약현은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의령 남씨의 소생으로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었다. 형제들이 숱한 어려움을 겪었어도 집안의 장남으로 굳건히 집안을 지켰다.

둘째 정약전은 정재원과 해남윤씨 소생이며, 아래로 두 명의 동생이 있다. 자산어보를 쓴 저자로 정약용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정조가 “형만 한 아우가 없다”고 할 정도로 박학다식하다. 흑산도에서 마을 청년 창대의 도움으로 어류도감을 쓴다. 지금의 어류도감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셋째 정약전은 우리나라 천주교 창립 멤버이다, 당시 한글로 된 천주교 교리 해설서 『주교요지』 쓴다. 신자들에게 교리를 강습하는 명도회 초대 회장이다. 신유박해 때 참수를 당하고 부인과 아이들은 유배형에 처한다.

1792년 4월 아버지 정재원(압해정씨 22세손)은 진주목사 재직 중에 돌아가시자 형제들은 경기도 광주(조안면 능내리)에 모여서 3년의 여막살이를 시작한다. 이때 아버지를 그리며 형제들은 당호를 짓는다.

큰형 정약현의 당호는 나를 지키는 집 수오재다 “수오재(守吾齋)라는 것은 큰형님이 그 집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에 의심하며 말하기를, “사물이 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는 나[吾]보다 절실한 것이 없으니, 비록 지키지 않은들 어디로 갈 것인가. 이상한 이름이다.” 하였다.

“대체로 천하의 만물이란 모두 지킬 것이 없고, 오직 나[吾]만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나는 잘못 간직했다가 나를 잃은 자이다.” (수오재기 중에서)

손암 정약현의 당호 매심재는 뉘우치는 사람이다. “둘째 형님이 초천(苕川)으로 돌아가서 그의 재실(齋室)을 ‘매심(每心)’이라 이름하고 나에게 기(記)를 지으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매심(每心)이라는 것은 회(悔)인데, 나는 뉘우침이 많은 사람이다. 나는 늘 마음속으로 그 뉘우침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재실을 이렇게 이름 붙였으니, 네가 기를 써라.”

“뉘우침은 죄과(罪過)로부터 덕성(德性)을 기르게 하니, 그 이치는 한가지이다. 나는 뉘우쳐야 할 일이 둘째 형님에 비교하면 만 배나 더하니, 이것을 빌어다가 내 방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이것이 내 마음속에 있으니, 내 방에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매심재기 중에서)

여유당은 정약용 선생의 당호이다. “나의 병은 내가 잘 안다. 나는 용감하지만 지모(智謀)가 없고 선(善)을 좋아하지만 가릴 줄을 모르며, 맘 내키는 대로 즉시 행하여 의심할 줄을 모르고 두려워할 줄을 모른다. 내가 노자(老子)의 말을 보건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고 하였으니, “아, 이 두 마디 말은 내 병을 고치는 약이 아닌가.”

“내가 이 뜻을 얻은 지 6~7년이 되는데, 이것을 당(堂)에 편액으로 달려고 했다가, 이윽고 생각해 보고는 그만두었다. 초천(苕川)에 돌아와서야 문미(門楣)에 써서 붙이고, 아울러 이름 붙인 까닭을 적어서 어린아이들에게 보인다.” (여유당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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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옥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