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해관解官 6조 / 제3조 원류願留

임기를 마친 목민관


떠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김이 간절하여 길을 막고 머무르기를 원하여, 광채를 사책(史册)에 남겨 후세에 전하게 하는 것은 말과 형식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후한(後漢) 제오륜(第五倫)이 회계 태수(會稽太守)로 있을 적에 아내가 손수 밥을 지었다. 만기가 되어 돌아올 때에 백성들이 말을 붙들고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우리를 버리고 어디를 갑니까?” 하였다.

맹상(孟嘗)이 합포 태수(合浦太守)로 있다가 돌아올 때에 아전과 백성들이 수레를 붙들고 청하여, 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상인의 배에 붙여서 밤에 도망하여 갔다.

이원굉(李元綋)이 윤주(潤州)를 다스려서 은혜스러운 정사를 베풀었다. 체임되어 갈 때에 아전과 백성이 길을 막고 머무르게 하고, 까막까치가 떼를 지어 날아와서 또한 수레를 옹위하고 갔다.


후한(後漢) 후패(侯覇)가 회양 태수(淮陽太守)로 있다가 부름을 받아 도성으로 가는데, 백성들이 부르짖어 울며 사자(使者)의 수레를 막고 멍에채를 붙잡으며 수레바퀴 아래에 누워, 후패를 1년 유임할 것을 빌고, 심지어 그 젖먹이는 아내에게 자식을 버리도록 하였으니, 후패가 가면 보전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唐)나라 요원숭(姚元崇)이 형주목(荊州牧)이 되었는데, 교대되는 날 백성들이 말머리를 둘러싸고 길을 막아 가지 못하게 하고, 채찍과 등자(鐙子)를 백성들이 모두 끊어서 감추었다.


당(唐)나라 유관(劉寬)이 평릉령(平陵令)으로 있다가 임기가 차서 떠나가게 되니, 백성들이 수레를 붙잡고 수레바퀴를 막아서 길이 가득하였다.

안비(顏斐)가 경조윤(京兆尹)으로 있다가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옮기니, 아전과 백성들이 부르짖어 울며 길을 막으므로 걸음마다 늦어져서 하루 수십 리 밖에 가지 못하였다. 간 뒤에 비를 세우고 송(頌)을 지었다.

당(唐)나라 원자(袁滋)는 화주 자사(華州刺史)가 되어 정사를 맑고 간편하게 하였다. 만기가 되어 양오릉(楊於陵)이 대임으로 왔다. 원자가 떠나는데, 늙은이들이 길을 막아 갈 수가 없었다. 양오릉이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내가 감히 원공의 정사를 바꾸지 않겠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늘어서서 절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제야 가게 되었다.

증자고(曾子固)가 제주 지주(齊州知州)로 있을 때에, 마침 조정에서 법을 변경하고 사신을 사방으로 보내어 나왔다. 공이 시행하는 것이 방법이 있어서 백성들이 소요하지 않았다. 그만두고 가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다리를 끊고 문을 닫아 막으면서 만류하므로 밤에 틈을 타서 갔다.

증치요(曾致堯)가 수주 지주(壽州知州)가 되어 은혜로운 정사가 있었다. 체임되어 가게 되자, 수주 사람들이 막아 며칠을 머물렀다. 말 한 필과 두 사람의 군사만을 데리고 도망하여 다른 고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도 수주 사람이 뒤쫓아 오는 자가 있었다.

요개공(姚蓋恭)이 경성현(頃城縣)을 맡았는데, 경내가 잘 다스려졌다. 백성들이 길을 막고 머무르기를 청하므로 조서(詔書)를 내리고 곡식과 비단을 상으로 주었다.

양계종(楊繼宗)이 가흥 지부(嘉興知府)가 되었을 때 종 하나만을 데리고 있어 마치 나그네와 같았다. 9년 만기가 되자, 노소(老少)의 백성이 길을 막고 머무르게 하였다.

진일(陳鎰)이 섬서(陝西)를 진수(鎭守)한 지 10여 년 동안 백성들이 그를 가까이하고 사랑하였는데, 그가 수염이 아름다우므로 붕자야(鬅子爺)라고 불렀다. 한번은 일을 의논하기 위하여 조정에 돌아가는데, 백성들에게는 체임되어 간다고 와전(訛傳)되어, 길을 막고 머물러 주기를 비는 자가 수천 명이나 되어 길을 갈 수가 없었다. 진일이 다시 오겠다고 타이르자 비로소 차츰차츰 흩어져 갔다.

유철(兪㯙)이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군내가 크게 다스려져서 고을에 보리 이삭이 두 가닥으로 나오는 상서가 있었다. 얼마 뒤에 공이 사면하고 돌아갈 뜻이 있어 부모를 뵈러 가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고을 사람이 날마다 그의 집에 나아가 청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고을에 포흠진 사람이 많은데, 내가 때리고 독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사면하려 한다.”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서로 말하여 한꺼번에 모두 바쳤다.

유정원(柳正源)이 자인 현감(慈仁縣監)으로 있을 적에 휴가를 받아 돌아오면서 그대로 벼슬을 그만둘 뜻이 있었다. 고을 백성들이 아문(衙門)을 지키고 사흘 동안 밤낮으로 가지 않으므로 그는 식구들을 아문에 머물러 두어 다시 올 뜻을 보였다.


돌아와서는, 세 번 사장(辭狀)을 올리니, 순사(巡使)가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민심이 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허둥지둥하는데 사정(私情)을 따라 공사(公事)를 폐할 수는 없다.” 하였다. 공이 할 수 없이 관에 돌아오니, 고을 백성들이 모두 교외에 나와 환영하였다.


김희채(金熙采)가 장련 현감(長連縣監)이 되어 인자하고 착하게 정치를 하였다. 안협(安峽)으로 옮기게 되자, 고을 백성들이 길을 열 겹으로 막았다. 그는 밤을 타서 빠져 도망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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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미옥 기자 다른기사보기